100일간의 유럽축구여행을 마무리하며

Posted by Soccerplus
2013. 5. 7. 08:53 축구이야기

지난 2월 2일, 제가 가장 좋아하는 친구와 처음으로 EPL경기를 보게 되었습니다. 웨스햄과 스완지의 대결이었고, 웨스트햄에는 일절 관심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스완지쪽의 티켓을 구하지 못해 웨스트햄쪽의 표를 사서 들어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주변 홈팬들에게 기분이 나쁠까봐 기성용 선수의 이름을 말하지 못하고 둘이서만 속닥댔던 기억이 있습니다. 제 눈앞에서 펼쳐진 티비속의 모습들은 뭐랄까 그저 신기하기만 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저의 축구 경기는 지금껏 100일이 채 안되는 시간동안 14경기를 보았습니다. 일주일에 한 라운드씩 진행이 되고, 그중 1주일은 A매치데이 기간으로 유럽축구가 쉬었으니 일주일에 한경기 이상을 본 셈입니다. 챔피언스리그를 두 경기, 캐피털원컵 한경기, FA컵 한경기, 라리가 한경기, 국가대표팀 평가전 한경기, 분데스리가 한경기, 그리고 프리미어리그를 7경기나 보았습니다. 

저는 영국 런던에서 남쪽으로 1시간 거리에 있는 브라이튼에 교환학생으로 와있습니다. 애초부터 교환학생을 와서 공부를 할 생각은 없었고 여기까지 온김에 축구를 많이 보고 와야지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죠. 물론 이정도로 매주에 한번 축구를 보러갈 생각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한경기 두경기보다보니 저도 모르게 이들에게 빠져들고 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고, 운동장에서 선수들과 팬들이 주는 그 묘한 기분에 중독이 되어버린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 결국엔, 3주간의 부활절방학의 루트를 축구를 보기위해 모두 할애했습니다. 지동원과 구자철, 그리고 손흥민 선수가 함께했던 함부르크와 아우구스부르크의 경기를 보았고, 스페인으로 건너가 호날두를 보기도하였으며, 베컴이 누캄프에서 야유를 듣는 장면을 현장에서 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별일이 없었던 주말에는 무조건 런던으로 가서 경기를 보았던 것 같습니다. 모든 일정이 축구에 맞춰져 있었습니다. 물론 학업이 우선인 학생의 신분이지만, 제 인생에 이런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거라 생각하니 괜시리 더 조급해져서 계속해서 경기를 보았습니다. 런던만 10번은 당일치기로 다녀온 것 같은데, 아직도 빅벤과 국회의사당을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후회는 없습니다. 저의 100일간의 영국생활을 자신있게 축구여행이라고 이름지을 수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 입니다.

그냥 신기했습니다. 처음에는, 이게 이런식으로 진행되는구나. 팬들이 정말로 엄청난 열정을 갖고 있구나. 이 선수들은 이런 응원가를 불러주고, 이런 상황에선 이런 반응을 보이는구나. 등등 정말 많은 기분을 느끼고 왔습니다. 이제는 어떤 상황에서 어떤 반응이 펼쳐지는지 조금은 예상할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축구는 이들의 인생입니다. 물론 모두가 축구에 자신의 인생을 거는 것은 아니지만, 이들의 일상 깊숙히에 축구가 박혀있습니다. 저희 학교 국제처의 뜨개질을 좋아하는 직원도 맨유의 박지성을 알고 있습니다. 박지성이 QPR로 이적했다는 뉴스는 모르지만, 전혀 축구를 좋아하지 않는 이들의 귀에도 축구소식은 어김없이 들려올 수 밖에 없는 곳입니다. 

처음 축구를 보면서 가장 신선한 충격이 뭐였냐면, 하프타임에 서포터즈들의 생일을 축하해주는 것이었습니다. 호날두가 4년만에 올드트래포드에 돌아와 세기의 대결을 펼치는 와중에도, 베컴과 즐라탄이 바르셀로나를 궁지에 몰아넣을 때도, 한번만 더 패배하면 팀의 강등이 확정되는 그 순간에도 장내에는 서포터즈들의 생일을 축하하는 아나운서의 방송이 이어집니다. 그만큼 이들의 생활속에 축구라는게 깊숙히 박혀있다는 증거겠지요. 

지난주에는 카디프에 갔었는데, 그날은 우연찮게도 카디프 시티 우승 퍼레이드가 있는 날이었습니다. 저녁 6시부터 시작하는 퍼레이드를 기다리려 4시간전부터 팬들이 잔디밭에서 누워서 응원가를 부르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응원가를 잘 들어보니 다름아닌 스완지에 대한 경고장이었습니다. "We're here for you, Jack Army"를 계속해서 외쳐대더군요. 단순히 생활이 아니라 그 지역사회를 대표해주는 하나의 마스코트와도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왜 맨유와 리버풀의 이적이 없는지, 반 페르시의 이적이 얼마나 충격적인 것인지 이곳에 오니 당연히 이해가 가더군요.

경기가 끝나고 펍에 가면 많은 서포터즈들과 어울릴 수 있습니다. 특히 나이드신 분들이 멀리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참 좋아하시면서 맥주를 한잔씩 사주시기도 합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얼마나 이 구단을 좋아하는지, 그 팀에 있는 한국선수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죠. 영국에 온지 세달이 넘었지만 여전히 영국발음은 익숙치 않습니다만, 그들의 팀을 향한 마음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타지에 오면 한국생각이 더욱 더 간절합니다. 하지만 저를 보고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왔구나라고 생각해주는 현지인들은 없습니다. 대부분은 중국인, 기껏해야 일본인이라고 생각하죠. 하지만 스완지에서, 카디프에서, 볼튼에서, 맨체스터에서, 그리고 함부르크와 아우구스부르크에선 아시아인은 한국인입니다. 아무리 많은 중국인들이 있어도, 한국 선수를 먼저 떠올립니다. 저에게 기성용의 친척이냐고 물어보는 사람도 있었고, 박지성의 팬들이 직접 이야기를 건네기도 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그리고 해외파 선수들의 플레이 하나하나에 한국팬들의 마음은 일희일비합니다. 한국선수가 경기에서 골을 넣는 것을 아직 한번도 보지 못했는데, 그 기분은 상상만해도 짜릿합니다. 

제가 그렇게들고 다녔던, 무려 방송을 탔던 태극기입니다. 좌측위에는 우리나라 선수들의 싸인을 받았습니다. 박지성, 윤석영, 구자철, 지동원 선수의 싸인입니다. 기성용, 이청용, 손흥민 선수의 것도 받으려 찾아갔지만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이 태극기는 현지팬들에게도 낯설지 않은 것입니다. 그들도 이미 소속팀의 선수를 통해 한국이라는 나라를 알고 있기 때문이죠.

캐피탈원컵 결승전에서는 기성용의 활약상에 웨일즈에서 온 남자팬들이 저를 안고 뽀뽀하고 난리가 났었고, 아직 잔류의 희망이 남아있었던 QPR과 스토크시티의 경기에서는 저의 태극기를 현지인들이 함께 흔들기도 했습니다. 이들의 생활속에 한국이라는 부분이 조금이라도 들어올 수 있었던 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더 신기했고 해외파 선수들의 활약에 더욱 더 신경이 갔던지도 모릅니다. 

2005년 박지성 선수가 맨유로 이적하면서 제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주말마다 약속을 뒤로하고 경기를 챙겨보았고, 당시 수험생이었던 저는 밤을 새고 경기를 본 뒤 학교에 가서 내내 졸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궁금한 부분도 많았고 알고 싶은 부분도 많았습니다. 혼자서 맨체스터 팬들에게 박지성 선수에 대한 인터뷰를 했었던 것은 지금생각해도 어처구니 없는 용기였습니다만,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뿌듯합니다. 태극기를 들고 현지인들과 어우러졌고, 제 태극기가 텔레비전에 나왔던 것도 잊을 수 없는 기억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저의 축구여행은 마무리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다다음주부터 시험기간이고, 그 다음주면 학기가 끝나버리고 저의 교환학생라이프도 끝을 맺게 되죠. 사실 축구에 너무 많은 돈을 쏟아부어 더이상 볼 여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만보겠다는 저의 다짐은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이번주말 박지성 선수의 QPR마지막 홈 경기를 보러가기로 했고, 맨 앞자리로 표도 구입했습니다. 1년동안 말도 안되는 팀에서 수고하신 박지성 선수에게 조그마한 힘이라도 된다면 그저 만족합니다. 저에게는 축구 여행의 로스타임이나 마찬가지인 셈입니다. 

아무리 이곳에 살아도, 단 4개월 5개월만에 어찌 이들의 삶을 모두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축구를 통해 이들의 생활의 일부라도 알게 된 것 같습니다. 2년동안 모은 돈을 단 3개월만에 다 쏟아부었습니다만 후회하지 않습니다. 사실 100일간의 축구여행을 하나의 글로 다 담는다는게 말도 안되는 일이죠. 축구 여행을 계획하시는 분들, 그리고 이들의 현장이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 좀 더 자세한 포스팅을 천천히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아참, 그리고 한국에 들어가면 우리나라 K리그를 더욱 더 아끼고 챙겨볼까합니다. 축구를 통한 가슴벅참과 설렘이 굳이 12시간 비행을 떠나 몇만원이 넘는 돈을 내고나서야 느낄 수 있는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축구 하나 밖에 남지 않을 저의 교환라이프지만, 축구때문에 외려 더 큰 추억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아참 그리고 이번 주말 태극기를 들고 로프터스로드에서 박지성 선수를 응원하는 맨 앞자리의 한국사람을 본다면 반가워해주세요. 축구여행의 마지막 로스타임을 누구보다 열렬하게 뛸 저이니까요.

글이마음에들면추천↓한방! (로그인 불필요)블로그가마음에들면정기구독+ 해주세요sz

soccerplus.co.kr 로 더 편하게 저의글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