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축구판 if 만약에 과거에 이랬더라면

Posted by Soccerplus
2014. 1. 7. 09:00 대표팀/월드컵 이야기

개인적으로 정말로 좋아하는 예능 프로그램인 무한도전에서 이번에 매우 흥미로운 주제로 특집을 진행했다. 바로 [만약에,if]라는 주제로 특집을 진행한 것이다. 무한도전이라는 프로그램에서, 그리고 무한도전 내부 인물들 가운데 어떤 부분을 전혀 다른 식으로 구성하여 만약을 가정해본 것이다. 노홍철이 장윤주와 결혼하는 시나리오를 가정하기도 했고, 길이 김숙과 송은이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는 장면이 연출되기도 하였다. 스포츠를 떠나 모든 상황에서 만약이라는 것은 무의미하지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운 주제였다. 

한국축구에서도 매우 드라마틱한 순간이 많았다. 특히 2000년대들어 수많은 스타플레이어들이 등장하고, 월드컵 4강등 훌륭한 순간들을 맞이했었다. 또한 그에 못지 않게 슬프고 어려운 시간들도 지나쳐야 했다. 만약 그 때 그 시간에, 한국축구가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면 이라는 주제로 상상을 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1. 2002년, 히딩크가 없었더라면

2002년 월드컵, 우리나라는 월드컵 4강이라는 위업을 달성했다. 그당시 뛰었던 선수들은 훗날 우리나라 축구 역사상 가장 빛나는 선수들로 기억에 남게 되었지만 그를 만든 것은 히딩크였다. 히딩크가 아닌 다른 감독이 자리에 앉았더라면 4강의 위업은 달성하기 어려웠을 수도 있다. 히딩크보다 먼저 대표팀 감독을 제의받은 감독은 98프랑스월드컵에서 조국을 우승으로 이끈 에메 자케 감독이었다. 이에 못지 않은 많은 감독들이 대표팀 사령탑의 물망에 올랐고 결국 히딩크 감독이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히딩크 감독이 이후 엄청난 업적을 세웠다는 것은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히딩크가 아니었더라면 4강은 힘들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다. 당시 우리나라의 전술적인 색과 본인의 축구 철학이 잘 맞아떨어졌고, 운또한 좋았다. 월드컵 4강이 아니었다면 2002년 전후로 일어난 축구붐도 그때처럼 크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히딩크 감독은 아인트호벤으로 부임하면서 박지성과 이영표를 데려갔는데, 이 두 선수가 훗날 두 차례 월드컵에서 우리나라의 핵심이 되었음은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다고 느껴진다. 2002년 16강에서 결승골을 넣었던 안정환은 소속팀 이탈리아 페루자에서 방출당했는데, 당시 최고의 폼이었던 안정환이라면 이탈리아에서 더 승승장구 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라는 상상을 해본다. 

2. 2005년, 박지성이 맨유가 아닌 다른 클럽으로 갔다면

2005년 여름, 박지성은 퍼거슨의 전화를 받고 맨유로 이적한다. 당시 첼시, 리버풀과 같은 팀에서 영입제의가 있었으나 박지성은 이를 뿌리치고 맨유로 입단한다. 맨유가 아닌 다른 클럽에서의 박지성은 상상할 수도 없고, 상상하기도 싫다. 퍼거슨 감독은 두차례나 장기부상을 겪었던 박지성을 기다려주었으며 수비형윙어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구단주의 압박이 심했던 첼시나 2000년대 중반 이후 몰락의 시절을 겪어야 했던 리버풀에 가는 것보다, 박지성 본인이 더 많은 타이틀을 거머쥐고 더 큰 성장을 이뤘던 맨유라는 선택은 확실한 선택이었다. 맨유가 아닌 첼시나 리버풀이 국민클럽이 될 수도 있었고, 에브라가 아닌 드록바나 제라드가 박지성의 친구로 런닝맨에 등장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3. 2006년 독일월드컵, 스위스전 부심의 깃발이 올라가지 않았더라면


2006년, 독일월드컵은 우리나라에게 아픈 역사로 간직되고 있다. 스위스전, 1:0으로 뒤진 상황에서 주심의 애매한 판정으로 골이 선언된 것이다. 이는 오프사이드 상황이라고 밝혀지긴 했지만, 부심이 깃발을 올리면서 운동장에 있던 21명의 선수가 플레이를 중단하게 된다. 단 한 명, 스위스의 공격수 프라이를 제외하고 말이다. 프라이는 혼전을 틈타 골을 넣었고 이는 선수들의 사기를 저하시켰다. 한국은 1승 1무 1패, 토고와 프랑스를 상대로 승점 4점을 기록하고도 월드컵 16강진출에 실패했다. 

만약 이 깃발이 올라가지 않았더라면 프라이의 골은 힘들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게 된다면 1:0인 상황에서 경기가 진행되었을 것이고, 우리나라 선수들의 투지가 불타올랐을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는 스위스를 꼭 이겨야만 했기 때문에 후반 10여분이 남겨진 상황에서 역전까지 기대를 하기는 힘들었을수도 있겠지만 지금까지 아쉽게 남아있는 것처럼 슬픈 기억은 없었을 것이다. 이 억울함은 아직까지도 한국팬들의 가슴에 남아있다. 

4.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우루과이전 이동국의 슛이 들어갔더라면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우리나라는 원정 16강을 달성하고 우루과이와 16강에서 만났다. 2:1인 상황, 박지성의 킬패스를 받은 이동국에게 1:1 찬스가 왔다. 너무나 좋은 찬스에서 이동국은 제대로 임팩트를 주지 못하면서 절호의 찬스를 날리게 된다. 이 골이 들어갔더라면 2:2 동점이 되는 경기였고, 최고의 경기력을 보였던 박지성과 함께 우리나라는 이 경기를 지배하고 있었다. 최소한 연장까지 갈 수 있었던 승부였고 이 경기를 이겼다면 가나와 8강에서 붙게 되었을 것이다. 우루과이는 가나를 이기고 4강에 진출했고, 디에고 포를란은 골든슈를 탔다. 

만약 이동국이 골을 넣었다면, 본인에게도 크나큰 한을 푸는 골이었을 것이다. 98년 월드컵 이후 12년만에 돌아온 월드컵 무대에서 주어진 첫번째 슛찬스, 너무나 아쉽게 날려버렸다. 팬만큼이나 안티를 갖고 있는 이동국에 대한 논란이 사그러질 수 있었던 장면이었고, 한국이 우루과이를 넘어 8강 이상의 성적을 냈다면, 주장 박지성이 포를란정도의 위치에 서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다. 허정무 감독은 히딩크를 잇는 영웅이 되었을 것이고, 이청용, 기성용, 박주영의 주가도 지금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5. 2011년 박주영, 아스날을 택하지 않았더라면

2011년 여름, 박주영은 AS모나코를 떠나 프랑스 명문 클럽 릴 OSC로의 이적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리고 릴에서 메디컬을 받던중 아스날의 아르센 벵거감독의 부름을 받고 박주영은 아스날로 이적했다. 아스날 이후의 날들은 너무나 처참했다.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땄지만 셀타 비고에서의 생활에서도 그리 녹록치 않았다. 지금은 아예 투명인간 취급을 받으며, 아스날 팬들의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가 릴로 이적했다면 팀의 주전 공격수로 활약할 수 있었을 것이다. 꿈에 그리던 빅리그 빅클럽은 아니더라도 더 많은 출전기회와 골기회가 주어졌을 것이고, 지금처럼 폼이 떨어져 국가대표팀에 소집되지 않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6. 2012년 박지성, 맨유를 떠나지 않았더라면

지금도 너무나 아쉬운 것이 2012년 박지성의 QPR이적이었다. 박지성은 자신에게 기회가 주어질 것 같지 않자 미련없이 QPR로 이적을 했다. 공격적인 투자를 했던 QPR이지만 모래알 조직력과 감독 역량의 문제가 대두되며 20위로 강등되고 말았다. 당시 경쟁자로 거론되던 발렌시아, 나니, 애쉴리 영의 폼이 모두 최악이었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박주영이 맨유에 남았더라도 출장기회가 주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퍼거슨의 마지막을 함께 못했다는 아쉬움도 뒤따른다. 맨유에서 1년을 더 뛰었다면 지금보다 더 좋은 환경, 더 큰 리그에서 뛰고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7. 2012년 올림픽 3,4위전에서 일본에게 졌더라면

2012년 올림픽에서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졌다면, 지금과 많이 다른 상황이 펼쳐졌을 것이다. 박주영은 여전히 모나코 사람이라는 비아냥을 들으며 한국에 오고 싶어도 오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을 것이고, 기성용, 김보경, 지동원 같은 선수들은 병역문제때문에 유럽에서의 생활이 안정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또 한번의 기적같은 명승부가 한국축구에서 가장 기억되기 싫은 날로 변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8. 순간의 선택, 많은 것을 좌우한다

만약이라는 가정이지만 우리는 순간의 선택이 많은 것을 좌우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단순히 축구에서 뿐만아니라 세상 모든 곳에서도 작동하는 논리다. 아쉬운 것은 아쉬운 것이지만 이 아쉬움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선수들을 보면 참 귀감이 된다. 아쉬워해 무엇하겠는가, 과거는 과거일뿐 지금 현재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을 우리 선수들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