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반 5분, 대한민국 가로막던 껍질이 깨졌다 (한국 러시아)

Posted by Soccerplus
2014. 6. 18. 09:20 대표팀/월드컵 이야기

후반 5분, 대한민국을 가로막던 '껍질'이 깨졌다. 그간 선수들이 압박감과 컨디션 저하로 제대로된 경기를 보여주지 못했다고 생각했는데, 전반전에 잘 막아내더니 후반전에 결국은 껍질을 부수고 나왔다. 이청용, 기성용이야 원래 경기를 잘 하는 선수들이었지만 이번 대회에서 월드컵 데뷔를 하는 선수들이 자신의 능력을 두려움없이 보여주었다. 

일단 구자철이 이 시간을 기점으로 살아났다. 구자철의 제일 좋은 강점은 바로 '볼키핑'인데, 전반전 초반부터 볼터치가 좋지 않았다. 상대가 태클을 들어오면 공을 키핑하지 못하고 빼앗기거나 터치아웃을 만드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후반 3분, 러시아의 맹공을 막아 낸 뒤 구자철이 과거 '구지단'의 모습을 보였다. 세 명의 수비수를 상대로 두고 볼을 빼앗기지 않으며 탈압박을 해냈다. 압박을 벗어나면서 기회를 만들어내는 모습, 지난 두 번의 평가전에서 보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그리고 1분 뒤, 더욱 더 반가운 장면이 나왔다. 이번에는 바로 윤석영이었다. 전반전 내내 오버래핑을 자제하면서 수비적으로 나서던 윤석영이 수비라인부터 공격라인까지 공을 쭉 치고나가면서 상대를 무너뜨렸다. 결국 중요한 프리킥까지 얻어내는 수훈을 보여주었다. 김진수가 부상으로 낙마하면서 아쉬웠고, 박주호가 몸이 올라오지 않은 상황에서 윤석영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는데, 윤석영은 수비적으로도 괜찮았고 공격적으로도 좋았다. 

이 두 선수의 움직임의 변화는 우리나라 전체 움직임의 변화를 말해주는 심벌과도 같았다. 후반 10분에는 박주영과 이근호를 교체하면서 원하는 대로 경기를 이끌어 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박주영이 전반과 후반 초반을 맡아주고 체력이 떨어진 상대의 뒷공간을 이근호가 공략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근호 교체는 골로 이어졌다. 

잘했다. 튀니지와 가나에게 연패를 당하고 분위기가 가라앉을대로 가라앉았었다. 러시아는 한국전 승리를 당연시여겼다. 하지만 한국은 역시 실전에 강했다. 가나전에서 그렇게 비난을 받았던 한국영과 기성용은 이번 경기에서 여유있는 볼키핑과 적절한 태클로 상대의 중원진입을 어렵게 만들었다. 90분동안 상대가 1:1 상황을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는 것 자체가 우리가 잘했다는 증거다. 정성룡도 잘했다. 정성룡은 상대의 중거리슛을 잘 막아내면서 우려를 씻었다. 야신 이후 러시아 최고의 골키퍼라는 아킨페예프도 실수를 하는 대회다. 그만큼 경험의 값어치는 대단한 것이다. 

단지,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두 번이나 나왔다. 홍정호가 후반 20분을 남기고 다리에 쥐가나서 아웃되었던 것이 너무나 아쉽다. 실점장면에서 황석호가 아니라 경기의 집중력이 있는 홍정호였다면 결과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러시아를 눌렀다면 16강이 매우 유력해질수도 있었겠지만 팀이 보여준 좋은 경기력에 만족하려 한다. 한국영과 홍정호가 쥐가나면서 유기적인 선수들의 호흡에 문제가 생겼고, 결국 실점으로 이어졌다. 패널티 박스내에서 허용한 슈팅이 세개 밖에 되지 않았지만(나머지는 이그나셰비치의 헤딩슛) 아쉽게도 리바운드 볼이 상대팀을 맡고 케르자코프 앞에 떨어지면서 우리나라는 실점을 허용하고 말았다. 

우리나라 경기를 기대하지 않는다고, 이번 대회 한 골만 넣어도 만족하겠다고 큰소리 뻥뻥치던 사람들에게 우리나라가 이렇게 잘하는 팀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러시아는 20경기에서 단 10실점밖에 하지 않았고, 최근 10경기에서 20득점을 했다. 상대팀 감독은 누구인가, 레알 마드리드, 잉글랜드, 그리고 러시아의 감독을 맡고 있으며 32개 국가중 연봉이 가장 많은 파비오 카펠로 감독이다. 그런 감독이 경기 내내 표정을 펴지 못했다. 우리나라가 그만큼 강하다는 증거이며, 그만큼 잘 준비했다는 증거다. 

많은 해설위원들이 러시아전이 가장 어려울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러시아의 조직력을 무시하지 못한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오늘 경기에서 러시아의 조직력을 그렇게 찾아보지는 못했던 것 같다. 준비를 잘했고, 우리나라 선수들이 정말 잘 뛰어주었다. 지킬때는 지키고 나설때는 잘 나서면서 효율적인 경기운영을 했다고 본다. 한가지 아쉬운 것은 선수들의 체력이었는데, 습도가 너무나 높은 쿠이아바에서 90분내내 기량을 발휘하기란 어려운 듯 했다. 이 장면에서는 박지성이 생각나기도 했다. 

이제 대표팀을 향한 회의론은 사그라들고 점점 더 팬들도 하나가 되어 우리나라를 응원할 계기를 마련했다. 또한 선수들도 자신들을 가로막던 '두려움'의 껍질을 완전히 깨버렸다. 경기가 끝난 뒤, 승리를 못해 아쉬워하는 쪽은 오히려 우리였다. 이제 알제리를 상대로 진짜 승부를 하게 된다. 알제리를 누르고 벨기에가 러시아를 잡아주거나 최소한 무승부를 하게 되면, 우리나라의 16강 가능성은 높아진다. 알제리와의 명승부를 다시 한 번 기대하며, 오늘 경기를 잘 뛰어준 선수들에게 수고했다고 말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