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가와 맨유 방출, 결국 넘지 못한 박지성의 벽

Posted by Soccerplus
2014. 9. 3. 08:00 해외 축구 리그 이야기


카가와가 도르트문트로 이적했다. 2012년 여름, 도르트문트에서 맹활약하며 맨유행을 택했던 카가와 신지는 그가 오자마자 QPR로 이적했던 박지성과 오버랩이 되면서 묘한 경쟁 구도를 남겼다. 떠난 박지성을 카가와가 뛰어 넘는다면 그간 박지성을 부러워했던 일본팬들을 도리어 우리가 부러워해야하는 상황이 될 수도 있었다. 카가와는 첫 시즌 퍼거슨 감독의 중용을 받으면서 아시아인 최초로 EPL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는 등 좋은 활약을 보였다. 박지성이 넣었던 골기록을 갈아치우기도 했었다. 하지만 지난 시즌 감독이 바뀌면서는 단 한 골도 넣지 못하며 주전자리에서 밀렸고, 결국 맨유에서 두 시즌만에 방출되었다. 

 카가와가 첫 시즌에 맨유에서 순항할 때까지만 해도, 한국팬들은 말할 수 없는 불안함이 있었고 일본 팬들은 환호로 가득찼다. 빅경기에서는 늘 선발명단에 없었지만 노리치를 상대로 해트트릭을 하는 등, 전반적으로 좋은 경기를 했었다. 이렇게 몇 시즌을 보낸다면 박지성의 기록들도 차례대로 깨지지 않을까라는 걱정이 되기도 했다. 

박지성은 맨유에서 205경기를 뛰었고 27골을 넣었으며 26어시스트를 기록했다. 2005년부터 2012년까지 총 7시즌을 있었으며 그간 챔피언스리그 트로피를 한차례 들어올렸고, 두번은 챔스 결승에서 선발로 나왔다. 또한 EPL의 라이벌들인 리버풀, 첼시, 아스날을 상대로 모두 골을 기록한 선수다. 큰 경기에서 중용이 되었고, 중용이 되는 만큼 활약을 해주는 선수였다. 그 기간동안 맨유는 5번의 리그 트로피를 들어올리는 등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카가와가 맨유에 입단할 때만 해도 그랬던 박지성을 넘어설 수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많았다. EPL의 상징과도 같은 맨유에서 일본 선수가 한국 선수를 넘어서는 활약을 한다는 것은 양국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다. 한국을 대표하고 일본을 대표하는 두 축구스타가 같은 팀에서 경쟁을 한다는 것도 기대가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카가와가 입단한지 한 달이 되지 않아 박지성이 이적을 하면서, 이제는 카가와가 박지성의 기록과 영향력을 넘어서느냐에 대한 문제로 경쟁 구도가 바뀌었다. 

카가와에게는 박지성을 뛰어 넘는 골 결정력과 순간 스피드가 있었지만, 박지성의 팀 플레이와 멀티 플레이어 능력을 갖고 있지 못했다. 맨유라는 클럽은 늘 세계적인 선수들이 들어올 수 있는 클럽이기에 어떤 선수들이 들어와도 조합이 될 수 있는 선수가 되어야 한다. 월드클래스 선수가 아닌 이상, 이런 능력을 갖추는 것은 숙명과도 같다. 박지성은 양발을 잘 활용하며 왼쪽과 오른쪽 윙어로 모두 나올 수 있었고, 중앙 공격형 미드필더의 역할도 잘 소화했다. 맨유 말년에는 중앙 미드필더로의 변신도 했다. 또한 자타가 공인하는 팀플레이어로서, 엄청난 활동량으로 다른 선수들이 함께 뛸 때 편안함을 느끼게 하는 선수이기도 했다. 전술적으로도 뛰어난 활용도를 가지고 있어서 수비형 윙어라는 새로운 롤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퍼거슨이 중요한 경기때마다 그를 전술적인 키 역할을 맡으며 숱한 명경기들을 만들기도 했다. 

카가와가 처음 맨유에 들어올 때는 개인 기량만 놓고보면 박지성보다 낫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었다. 팀 플레이에 중심을 맞추는 박지성은 그렇게 화려하지 않은 플레이어였지만 카가와는 도르트문트에서 팀의 중심이 되어 많은 공격포인트를 올리며 맹활약을 했다. 계약 기간이 1년밖에 남지 않아 이적료를 두둑히 받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으면서도 박지성의 배가 넘는 이적료를 받았다. 박지성과 비슷한 나이에 이적을 하며 전성기를 맨유에서 맞이하는 듯 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한 채 도르트문트로 돌아갔다. 

늘 카가와와 박지성은 비교가 되는 상대였다. 라이벌인 두 나라에서 각 축구계를 대표하는 두 선수였고, 같은 팀에서 뛰는 인연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카가와는 결국 맨유에서 성공하지 못했다. 첫 시즌부터 몸싸움에서 밀리며 압박에 약한 모습을 보였으나 끝까지 그 약점을 보완하지 못했다. 좌측 윙어의 자리에서 기회를 적지 않게 받았다. 하지만 자신의 스타일을 포기하지 못했다. 좌측 풀백 에브라를 이용하는 플레이도 보여주지 못했고, 좌측면에서 중앙의 공간을 파고드는 움직임도 없었다. 왼발잡이가 아닌 카가와에게 필요한 것은 활발한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활동량이 많지 않고, 왼발도 쓰지 못하는 카가와에게 좌측 미드필더는 쉽지 않았다. 공격형 미드필더, 혹은 쉐도우 미드필더에 국한된 카가와의 쓰임새는 그의 주전 경쟁에 악영향을 미쳤다. 

그가 이적한 뒤, 반 페르시와 마타가 들어오면서 주전 경쟁에 어려움을 빚었다. 그리고 팔카오가 디 마리아가 들어오면서 그는 더 이상 필요없는 자원이 되었다. 도르트문트로 이적하며 7번 등번호를 받았지만, 그는 결론적으로 팀에서 방출통보를 받고 이적을 한 것이나 다름없다. 맨유에서 탈출했다고 말하는 팬들도 있지만, 그는 맨유에서 살아남지 못했다. 거액의 이적료를 받고 이적을 한 많은 맨유 선수들이 모두 성공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카가와도 그런 처지에 놓였다. 베르바토프, 안데르손, 펠라이니, 애쉴리 영같은 선수들과 같은 처지다. 

맨유에서 성공 가능성이 높다고 봤었던 카가와였지만, 결국엔 박지성의 벽을 넘지 못했다. 박지성처럼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많았지만, 박지성의 벽은 매우 높은 것이었다. 누구보다 뛰어난 팀플레이와 전술수행능력을 가진 박지성은 다른 선수들이 할 수 없는 능력들을 갖고 있는 선수라는 것이 간접적으로 증명이 된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개리 네빌은 박지성의 이적이후 맨유의 측면이 무너졌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그렇다. 박지성의 맨유 7년은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그만의 능력으로 이뤄낸 것이다. 카가와의 실패로 아시아인이 박지성의 아성을 넘는 것은 무기한으로 미뤄지게 되었다.